랜드해협 우주경쟁 Landstrait Space Race | Космическая гонка в Ландском проливе | ||
랜드해협의 냉전의 일부 | ||
기간 | 제1차: 1957년 12월 19일 ~ 1987년 10월 21일 제2차: 2002년 ~ 현재 | |
장소 | 지구 저궤도·극궤도·고타원궤도·정지궤도 랜드해협 상공 | |
원인 | 제1차 랜드 대전 이후 해협 대치선의 고정 짧은 미사일 비행시간에 따른 정찰·조기경보 수요 양국의 우주조약 체제 불참 | |
결과 | 센츄리움 궤도협정 체결로 제1차 경쟁 종결 궤도·부분궤도 핵무기 철거 조기경보위성 상호 불가침 원칙 확립 협정 약화와 2013년 사비에트 탈퇴로 제2차 경쟁 진행 중 | |
경쟁 당사국 | ||
구분 | 루이나 측 | 사비에트 측 |
국가 | ||
주관 기관 | ||
주요 계획 | KESTREL · WATCHFIRE LODESTAR · CROW'S NEST KINGFISHER | 소바 · 메치 크레포스트 · 야스트레브 |
인명 피해 | 우주비행 중 3명 훈련 중 4명 | 우주비행 중 3명 훈련 중 2명 발사장 사고 92명공식 |
상대국 위성 파괴 | 없음시험 표적 제외 | |
달은 해협을 내려다보지 않는다.오거스트 L. 펠프스 루이나 해군참모총장, 1969년 7월 하원 군사위원회 증언
궤도는 영토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영토 위에 있다.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 사비에트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1968년 국방인민위원회 보고
1. 개요2. 명칭3. 배경4. 제1차 우주경쟁 (1957~1987)
4.1. 12월 통과 (1957~1958)4.2. 눈의 경쟁 (1959~1965)4.3. 조약 밖의 궤도 (1966~1968)4.4. 궤도의 검 (1966~1975)4.5. 망루와 요새 (1962~1979)4.6. 요격 시험 (1968~1985)4.7. 전쟁 속의 궤도 (1970~1980)4.8. 정지궤도 위기 (1981~1984)4.9. 센츄리움 궤도협정 (1985~1987)
5. 궤도의 휴전 (1987~2002)6. 신우주경쟁 (2002~현재)7. 특징8. 미소 우주경쟁과의 비교8.1. 왜 달에 가지 않았는가
9. 주요 기록10. 평가11. 영향12. 대중매체에서13. 여담14. 관련 문서1. 개요 [편집]
랜드해협 우주경쟁(Landstrait Space Race)은 1950년대 후반부터 랜드해협에서 루이나와 사비에트를 중심으로 심우주 개발과 전략화를 목표로 벌어진 우주경쟁이다.
랜드해협은 예로부터 신비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기술력 수준이 타 지역에 비해 우월했지만, 지역 특유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군사 관련 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우주경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같은 시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달 착륙처럼 '누가 먼저 가는가'를 두고 벌어졌다면, 랜드해협의 경쟁은 처음부터 '누가 궤도를 쥐는가'를 두고 벌어졌다. 양국이 궤도에 올린 물체의 대부분은 정찰·신호정보·조기경보·항법·해양감시 위성이었고, 유인 우주비행조차 궤도상의 군사 관측소를 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진되었다.
경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제1차 경쟁은 1957년 12월 사비에트의 첫 인공위성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가 루이나 해군기지 상공을 하루 최대 여섯 차례씩 통과하면서 시작되었고, 부분궤도 핵무기 배치, 무장 우주정거장, 위성 요격 시험, 1984년 정지궤도 위기를 거쳐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약 15년의 휴지기를 지나 2002년 루이나의 해상 기반 미사일 방어 착수와 2013년 사비에트의 협정 탈퇴를 거치며 제2차 경쟁, 이른바 신우주경쟁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양국은 30년 넘게 상대의 위성을 요격할 능력을 갖추고, 시험하고, 과시했지만 상대국의 위성을 실제로 파괴한 적은 없다. 이 때문에 랜드해협 우주경쟁은 '궤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궤도에서 벌어지지 않은 전쟁을 위한 준비'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으며[1], 그 준비가 실제 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만든 장치인 조기경보위성 상호 불가침 원칙이 이 경쟁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꼽힌다.
랜드해협은 예로부터 신비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기술력 수준이 타 지역에 비해 우월했지만, 지역 특유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군사 관련 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우주경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같은 시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달 착륙처럼 '누가 먼저 가는가'를 두고 벌어졌다면, 랜드해협의 경쟁은 처음부터 '누가 궤도를 쥐는가'를 두고 벌어졌다. 양국이 궤도에 올린 물체의 대부분은 정찰·신호정보·조기경보·항법·해양감시 위성이었고, 유인 우주비행조차 궤도상의 군사 관측소를 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진되었다.
경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제1차 경쟁은 1957년 12월 사비에트의 첫 인공위성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가 루이나 해군기지 상공을 하루 최대 여섯 차례씩 통과하면서 시작되었고, 부분궤도 핵무기 배치, 무장 우주정거장, 위성 요격 시험, 1984년 정지궤도 위기를 거쳐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약 15년의 휴지기를 지나 2002년 루이나의 해상 기반 미사일 방어 착수와 2013년 사비에트의 협정 탈퇴를 거치며 제2차 경쟁, 이른바 신우주경쟁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양국은 30년 넘게 상대의 위성을 요격할 능력을 갖추고, 시험하고, 과시했지만 상대국의 위성을 실제로 파괴한 적은 없다. 이 때문에 랜드해협 우주경쟁은 '궤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궤도에서 벌어지지 않은 전쟁을 위한 준비'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으며[1], 그 준비가 실제 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만든 장치인 조기경보위성 상호 불가침 원칙이 이 경쟁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꼽힌다.
2. 명칭 [편집]
'우주경쟁'이라는 명칭은 1958년 초 루이나 언론이 미소 간 경쟁을 가리키던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쓰면서 정착했다. 그러나 정작 경쟁의 당사자들은 이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루이나 국방부의 내부 문서는 이를 '궤도 우위 경쟁(Orbital Superiority Competition)'으로, 해군은 '고지 확보(The High Ground)'로 불렀고, 사비에트는 공식적으로 경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국의 활동을 '궤도 방위 투쟁(Борьба за оборону орбиты)'이라 칭했다. 사비에트 측 표현에는 스스로는 방어만 하고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는데, 루이나 측 표현에도 같은 주장이 담겨 있었다는 점에서 양쪽 명칭은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제1차'와 '제2차'라는 구분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사후적으로 붙은 것이다.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 체결 당시에는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1990년대 문헌은 1957~1987년을 가리켜 '궤도의 30년'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2013년 사비에트의 협정 탈퇴 이후 언론에서 '신우주경쟁'이라는 표현이 확산되면서 이전 시기가 제1차로 소급 분류되었다.
'제1차'와 '제2차'라는 구분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사후적으로 붙은 것이다.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 체결 당시에는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1990년대 문헌은 1957~1987년을 가리켜 '궤도의 30년'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2013년 사비에트의 협정 탈퇴 이후 언론에서 '신우주경쟁'이라는 표현이 확산되면서 이전 시기가 제1차로 소급 분류되었다.
3. 배경 [편집]
3.1. 해협의 7분 [편집]
미소 우주경쟁과 랜드해협 우주경쟁을 가른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거리였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비행시간은 약 30분이었고, 양국은 그 30분 동안 지상 레이더로 발사를 탐지하고, 판단하고, 대응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반면 해협을 사이에 둔 루이나와 사비에트 사이에서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비행시간은 11~14분에 불과했고, 해협 안에서 발사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6~8분이면 목표에 도달했다. 루이나 군 내부에서 쓰이던 '7분'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평균 비행시간에서 나온 것이다.
7분이라는 시간은 지상 레이더만으로는 의미 있는 경보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수평선 너머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은 상승 단계 후반에야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이 시점이면 이미 비행시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발사 순간을 곧바로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궤도에서 적외선으로 발사 화염을 관측하는 것뿐이었다. 궤도에 눈을 두지 못한 쪽은 경보 없이 맞거나, 경보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쏘는 두 가지 선택지만 갖게 된다는 것이 양국 군부의 공통된 인식이었고, 이 때문에 어느 쪽도 궤도를 상대에게 내줄 수 없었다.
해협의 폭이 좁다는 사실은 해군의 비중도 키웠다. 양국의 주력 함대와 전략잠수함은 해협과 그 인근 해역에 밀집해 있었고, 상대 함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일은 곧 전략적 선제권의 문제였다. 루이나 해군이 우주개발 초기부터 주도권을 쥐려 한 이유, 그리고 해양감시위성과 항법위성이 랜드해협 우주경쟁에서 유독 큰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궤도는 국경을 나누지 않았다. 해협을 관측하기 위해 궤도에 올린 위성은 궤도 경사각의 특성상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영토 위를 모두 지나갔다. 양국이 올린 모든 위성은 그 자체로 상대국 영토 위를 매일 수차례 통과하는 물체였고, 설령 과학 위성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는 잠재적 정찰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7분이라는 시간은 지상 레이더만으로는 의미 있는 경보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수평선 너머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은 상승 단계 후반에야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이 시점이면 이미 비행시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발사 순간을 곧바로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궤도에서 적외선으로 발사 화염을 관측하는 것뿐이었다. 궤도에 눈을 두지 못한 쪽은 경보 없이 맞거나, 경보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쏘는 두 가지 선택지만 갖게 된다는 것이 양국 군부의 공통된 인식이었고, 이 때문에 어느 쪽도 궤도를 상대에게 내줄 수 없었다.
해협의 폭이 좁다는 사실은 해군의 비중도 키웠다. 양국의 주력 함대와 전략잠수함은 해협과 그 인근 해역에 밀집해 있었고, 상대 함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일은 곧 전략적 선제권의 문제였다. 루이나 해군이 우주개발 초기부터 주도권을 쥐려 한 이유, 그리고 해양감시위성과 항법위성이 랜드해협 우주경쟁에서 유독 큰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궤도는 국경을 나누지 않았다. 해협을 관측하기 위해 궤도에 올린 위성은 궤도 경사각의 특성상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영토 위를 모두 지나갔다. 양국이 올린 모든 위성은 그 자체로 상대국 영토 위를 매일 수차례 통과하는 물체였고, 설령 과학 위성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는 잠재적 정찰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3.2. 제1차 랜드 대전과 대치선의 고정 [편집]
1963년 제1차 랜드 대전이 끝나고 사비에트의 영향 아래 해협 남부가 공산화되면서 양 진영의 대치선은 해협을 따라 고정되었다. 이후 1969년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이 NLTO를 창설하고, 1974년 가입 신청을 반려당한 사비에트가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해협은 두 군사동맹이 직접 맞닿는 경계가 되었다.
대치선의 고정은 우주 수요를 두 방향으로 키웠다. 첫째, 대전 말기 영공 침범 정찰기의 손실이 누적되면서 상대 영공에 들어가지 않고 적지를 관측할 수단이 절실해졌다. 둘째, 고정된 표적을 고정된 발사 기지에서 겨냥하게 되면서 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측지 정보, 즉 상대 영토의 정확한 좌표와 지구 중력장 자료가 필요해졌는데, 이는 위성 없이는 확보할 수 없는 정보였다.
대치선의 고정은 우주 수요를 두 방향으로 키웠다. 첫째, 대전 말기 영공 침범 정찰기의 손실이 누적되면서 상대 영공에 들어가지 않고 적지를 관측할 수단이 절실해졌다. 둘째, 고정된 표적을 고정된 발사 기지에서 겨냥하게 되면서 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측지 정보, 즉 상대 영토의 정확한 좌표와 지구 중력장 자료가 필요해졌는데, 이는 위성 없이는 확보할 수 없는 정보였다.
3.3. 기술적 토대 [편집]
루이나의 로켓 연구는 1931년 벨포르에서 결성된 민간 단체 루이나 로켓협회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 중반 해군이 협회 회원 일부를 함포 탄도 연구에 고용하면서 로켓 연구와 해군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이후 루이나 우주개발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이른바 '과수원 작전(Operation ORCHARD)'을 통해 독일 로켓 기술자 112명이 루이나로 이주했으며, 이들 가운데 카를 W. 슈탈만은 이후 해군의 첫 위성 발사체 「턴(TERN)」의 설계를 맡았다. 사비에트 역시 비슷한 시기 독일 기술자와 자료 일부를 확보했으나, 실제 발사체 개발은 국영 제1설계국과 제7설계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랜드해협 특유의 요인으로는 신비 연구에서 파생된 계측 기술이 꼽힌다. 능력자 관리를 위해 개발된 AIM 계측 장비는 극미약 신호를 다루는 증폭기와 자력계 기술을 크게 끌어올렸고, 이 기술은 1960년대 이후 양국 위성의 센서에 그대로 전용되었다. 개요에서 말하는 랜드해협의 기술적 우위는 상당 부분 이 계측 기술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2]
랜드해협 특유의 요인으로는 신비 연구에서 파생된 계측 기술이 꼽힌다. 능력자 관리를 위해 개발된 AIM 계측 장비는 극미약 신호를 다루는 증폭기와 자력계 기술을 크게 끌어올렸고, 이 기술은 1960년대 이후 양국 위성의 센서에 그대로 전용되었다. 개요에서 말하는 랜드해협의 기술적 우위는 상당 부분 이 계측 기술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2]
3.4. 선전 없는 경쟁 [편집]
미소 우주경쟁에서 선전은 핵심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 인공위성과 우주비행사는 체제 우월성을 세계에 보여 주는 수단이었고, 양국은 성과를 최대한 크게 알렸다. 랜드해협 우주경쟁은 그 반대였다. 성과의 대부분은 정찰·신호정보·조기경보 능력이었고, 이러한 능력은 알려지는 순간 상대의 대응을 불러오기 때문에 숨겨야 했다.
루이나는 민간 기관인 루이나 항공우주국(RASA)을 공개적인 얼굴로 내세우고, 군사 위성 상당수를 RASA의 과학 위성으로 위장해 발표했다. 1965년 기준 루이나의 공개 우주예산 가운데 RASA의 비중은 38%였으나, 국가정찰국 등 비공개 예산을 포함하면 실제 비중은 20% 안팎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에트는 첫 위성 이후 1962년부터 모든 군사 위성을 「궤도 연구 위성 ○호」라는 일련번호로만 발표해, 어떤 위성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최초' 기록 상당수는 당대에 알려지지 않았고, 수십 년 뒤 기밀 해제를 통해서야 확인되었다. 대중의 관심은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달 경쟁에 쏠려 있었으며, 1969년 루이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1%가 자국이 우주개발에서 "뒤처져 있다"고 답했다. 같은 해 말 루이나는 실제로는 세계 최초의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을 운용하고 있었다.
루이나는 민간 기관인 루이나 항공우주국(RASA)을 공개적인 얼굴로 내세우고, 군사 위성 상당수를 RASA의 과학 위성으로 위장해 발표했다. 1965년 기준 루이나의 공개 우주예산 가운데 RASA의 비중은 38%였으나, 국가정찰국 등 비공개 예산을 포함하면 실제 비중은 20% 안팎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에트는 첫 위성 이후 1962년부터 모든 군사 위성을 「궤도 연구 위성 ○호」라는 일련번호로만 발표해, 어떤 위성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최초' 기록 상당수는 당대에 알려지지 않았고, 수십 년 뒤 기밀 해제를 통해서야 확인되었다. 대중의 관심은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달 경쟁에 쏠려 있었으며, 1969년 루이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1%가 자국이 우주개발에서 "뒤처져 있다"고 답했다. 같은 해 말 루이나는 실제로는 세계 최초의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을 운용하고 있었다.
4. 제1차 우주경쟁 (1957~1987) [편집]
4.1. 12월 통과 (1957~1958) [편집]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을 때 루이나의 반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소련은 해협 밖의 강대국이었고, 루이나 언론은 이를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문제로 다뤘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두 달 뒤였다.
1957년 12월 19일 사비에트는 카스탄 자치지역의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1설계국의 S-2 발사체로 「프레드베스트니크(Предвестник) 1호」를 궤도에 올렸다. 무게 214kg, 근지점 231km·원지점 1,588km, 궤도 경사각 49.2도로, 사비에트는 이를 "대기 상층부를 관측하는 과학 위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이나 해군 신호정보부대는 이듬해 1월 초, 이 위성이 사비에트 지상국 상공을 지날 때마다 압축된 녹음 자료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분석 결과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는 궤도를 도는 동안 루이나 해군의 레이더 신호와 함대 통신을 수신·녹음했다가 자국 상공에서 한꺼번에 내려보내는 신호정보 위성이었다. 궤도 경사각은 루이나 최대의 해군기지인 브레스탄 해군기지가 하루 최대 여섯 차례 위성의 수신 범위에 들어오도록 정해져 있었다.
스푸트니크가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갔다'는 충격이었다면, 프레드베스트니크는 사비에트가 루이나를 '듣고 있다'는 충격이었다. 1958년 1월 14일자 《르 나시오날》은 1면에 「그들은 듣고 있다」라는 제목을 달았고, 이 사건은 이후 루이나에서 '12월 통과'로 불리게 된다. 사비에트는 첫 인공위성부터 군사 위성이었으며, 이 점이 이후 30년간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성격을 결정했다.[3]
루이나 해군은 1956년부터 준비해 온 위성 발사를 서둘렀다. 1958년 2월 6일 퀴냉 곶 해군 미사일 시험장에서 발사된 턴 발사체는 이륙 2초 만에 폭발했고, 언론은 이를 '가라앉은 턴'이라 조롱했다. 두 번째 시도인 1958년 5월 14일, 무게 21kg의 「헤론(HERON) 1호」가 궤도에 진입하면서 루이나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공위성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헤론 1호는 해양 기상 관측 위성으로 발표되었으나 시험용 전파 수신기를 함께 싣고 있었다.
헤론 1호 발사 직후 루이나 정치권에서는 우주개발을 누가 맡을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해군은 첫 위성을 쏘아 올린 실적을, 공군은 탄도미사일 개발 경험을 내세웠고, 과학계와 의회 일부는 군이 아닌 민간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19대 대통령 로런스 D. 페닝턴은 1958년 7월 29일 항공우주법에 서명해 민간 기관인 루이나 항공우주국을 설립하고, 우주활동 중 군사 목적에 해당하는 부분은 국방부 소관으로 명시했다. 그러나 법은 국방부 안에서 어느 군이 우주를 맡을지는 정하지 않았고, 이 공백은 이후 60년 넘게 이어지는 해군과 공군의 경쟁으로 남았다.
1957년 12월 19일 사비에트는 카스탄 자치지역의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1설계국의 S-2 발사체로 「프레드베스트니크(Предвестник) 1호」를 궤도에 올렸다. 무게 214kg, 근지점 231km·원지점 1,588km, 궤도 경사각 49.2도로, 사비에트는 이를 "대기 상층부를 관측하는 과학 위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이나 해군 신호정보부대는 이듬해 1월 초, 이 위성이 사비에트 지상국 상공을 지날 때마다 압축된 녹음 자료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분석 결과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는 궤도를 도는 동안 루이나 해군의 레이더 신호와 함대 통신을 수신·녹음했다가 자국 상공에서 한꺼번에 내려보내는 신호정보 위성이었다. 궤도 경사각은 루이나 최대의 해군기지인 브레스탄 해군기지가 하루 최대 여섯 차례 위성의 수신 범위에 들어오도록 정해져 있었다.
스푸트니크가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갔다'는 충격이었다면, 프레드베스트니크는 사비에트가 루이나를 '듣고 있다'는 충격이었다. 1958년 1월 14일자 《르 나시오날》은 1면에 「그들은 듣고 있다」라는 제목을 달았고, 이 사건은 이후 루이나에서 '12월 통과'로 불리게 된다. 사비에트는 첫 인공위성부터 군사 위성이었으며, 이 점이 이후 30년간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성격을 결정했다.[3]
루이나 해군은 1956년부터 준비해 온 위성 발사를 서둘렀다. 1958년 2월 6일 퀴냉 곶 해군 미사일 시험장에서 발사된 턴 발사체는 이륙 2초 만에 폭발했고, 언론은 이를 '가라앉은 턴'이라 조롱했다. 두 번째 시도인 1958년 5월 14일, 무게 21kg의 「헤론(HERON) 1호」가 궤도에 진입하면서 루이나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공위성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헤론 1호는 해양 기상 관측 위성으로 발표되었으나 시험용 전파 수신기를 함께 싣고 있었다.
헤론 1호 발사 직후 루이나 정치권에서는 우주개발을 누가 맡을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해군은 첫 위성을 쏘아 올린 실적을, 공군은 탄도미사일 개발 경험을 내세웠고, 과학계와 의회 일부는 군이 아닌 민간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19대 대통령 로런스 D. 페닝턴은 1958년 7월 29일 항공우주법에 서명해 민간 기관인 루이나 항공우주국을 설립하고, 우주활동 중 군사 목적에 해당하는 부분은 국방부 소관으로 명시했다. 그러나 법은 국방부 안에서 어느 군이 우주를 맡을지는 정하지 않았고, 이 공백은 이후 60년 넘게 이어지는 해군과 공군의 경쟁으로 남았다.
상세 내용은 루이나 항공우주국 문서 참고.
4.2. 눈의 경쟁 (1959~1965) [편집]
12월 통과 이후 양국이 가장 먼저 매달린 것은 상대를 보는 눈이었다. 루이나 해군은 1960년 3월 22일 전자정찰위성 「TIDEMARK」 1호를 발사했다. 표면상으로는 RASA의 태양복사 관측위성 SRO-2로 발표되었지만, 실제 임무는 사비에트 방공 레이더의 위치와 주파수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TIDEMARK는 1972년까지 12기가 발사되어 7기가 임무에 성공했고, 1961년 말까지 사비에트 방공 레이더망의 전체 배치도를 완성했다. 이는 궤도에서 운용된 세계 최초의 전자정찰위성이었다.
사진 정찰은 더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기술로는 궤도에서 찍은 사진을 전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름을 실은 회수 캡슐을 대기권으로 떨어뜨려 회수해야 했다. 공군은 1960년 2월부터 필름 회수 정찰위성 「KESTREL」의 발사를 시도했으나 아홉 차례 연속 실패했고, 그 사이 해군이 별도의 회수 위성 사업을 추진하면서 두 군은 또다시 맞섰다. 제20대 대통령 헨리 모리슨은 1961년 9월 6일 해군·공군·국가정보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루이나 국가정찰국(NRO)을 설립해 두 사업을 KESTREL로 통합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국가정찰국의 존재는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국가정찰국으로 넘어간 KESTREL은 1961년 12월 4일 처음으로 회수에 성공했다. 공군은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캡슐을 항공기로 공중에서 낚아채는 방식을 주장했지만, 해군은 캡슐을 바다에 착수시켜 함정으로 회수하는 방식을 고집했고, 결국 두 방식이 병행되었다. 회수를 전담한 해군 구축함들은 '포수(捕手)'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KESTREL은 1972년까지 118회 발사되어 84회 회수에 성공했으며, 해상도는 초기 7.5m에서 1965년 1.8m까지 향상되었다.
KESTREL이 가져온 첫 번째 결과는 루이나의 공포가 과장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60년 루이나 정보당국은 사비에트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대를 120~150기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1962년 KESTREL 사진으로 확인된 발사대는 46기였다. 이른바 '미사일 격차'가 허상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루이나의 미사일 증강 계획은 일부 축소되었는데, 이는 정찰위성이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대신 오히려 억제한 초기 사례로 거론된다. 사비에트의 필름 회수 정찰위성 「소바(Сова)」는 1962년 8월 첫 회수에 성공했고, 이후 연간 20~40기가 발사되며 루이나의 해군기지와 미사일 기지를 같은 방식으로 촬영했다.
이 시기 사비에트는 최악의 사고를 겪었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7설계국의 신형 K-7 로켓이 발사 준비 중 2단 엔진의 오작동으로 발사대 위에서 폭발해, 점검을 위해 발사대 주변에 모여 있던 인원 92명이 사망했다(공식 집계, 비공식 추정 120~130명). 사망자 가운데에는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 이고리 D. 네스테렌코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비에트는 네스테렌코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사르다 발사장 참사의 실체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62년 10월 28일 사비에트는 자국 내륙 상공 290km에서 300kt급 고고도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으로 형성된 인공 방사선대 때문에 루이나의 TIDEMARK 4호와 헤론 3호가 6주 안에 잇따라 기능을 잃었고, 사비에트 자신의 소바 위성 1기도 손상되었다. 루이나는 이 실험이 궤도상의 위성을 한꺼번에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시위였다고 주장했고, 사비에트는 순수한 무기 효과 시험이었다고 반박했다. 이 실험은 결과적으로 양국이 대기권·우주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나는 1963년 8월, 사비에트는 1964년 3월 조약에 가입했고, 이것이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함께 참여한 거의 유일한 우주 관련 국제 조약이 되었다.
사진 정찰은 더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기술로는 궤도에서 찍은 사진을 전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름을 실은 회수 캡슐을 대기권으로 떨어뜨려 회수해야 했다. 공군은 1960년 2월부터 필름 회수 정찰위성 「KESTREL」의 발사를 시도했으나 아홉 차례 연속 실패했고, 그 사이 해군이 별도의 회수 위성 사업을 추진하면서 두 군은 또다시 맞섰다. 제20대 대통령 헨리 모리슨은 1961년 9월 6일 해군·공군·국가정보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루이나 국가정찰국(NRO)을 설립해 두 사업을 KESTREL로 통합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국가정찰국의 존재는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국가정찰국으로 넘어간 KESTREL은 1961년 12월 4일 처음으로 회수에 성공했다. 공군은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캡슐을 항공기로 공중에서 낚아채는 방식을 주장했지만, 해군은 캡슐을 바다에 착수시켜 함정으로 회수하는 방식을 고집했고, 결국 두 방식이 병행되었다. 회수를 전담한 해군 구축함들은 '포수(捕手)'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KESTREL은 1972년까지 118회 발사되어 84회 회수에 성공했으며, 해상도는 초기 7.5m에서 1965년 1.8m까지 향상되었다.
KESTREL이 가져온 첫 번째 결과는 루이나의 공포가 과장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60년 루이나 정보당국은 사비에트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대를 120~150기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1962년 KESTREL 사진으로 확인된 발사대는 46기였다. 이른바 '미사일 격차'가 허상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루이나의 미사일 증강 계획은 일부 축소되었는데, 이는 정찰위성이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대신 오히려 억제한 초기 사례로 거론된다. 사비에트의 필름 회수 정찰위성 「소바(Сова)」는 1962년 8월 첫 회수에 성공했고, 이후 연간 20~40기가 발사되며 루이나의 해군기지와 미사일 기지를 같은 방식으로 촬영했다.
이 시기 사비에트는 최악의 사고를 겪었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7설계국의 신형 K-7 로켓이 발사 준비 중 2단 엔진의 오작동으로 발사대 위에서 폭발해, 점검을 위해 발사대 주변에 모여 있던 인원 92명이 사망했다(공식 집계, 비공식 추정 120~130명). 사망자 가운데에는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 이고리 D. 네스테렌코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비에트는 네스테렌코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사르다 발사장 참사의 실체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62년 10월 28일 사비에트는 자국 내륙 상공 290km에서 300kt급 고고도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으로 형성된 인공 방사선대 때문에 루이나의 TIDEMARK 4호와 헤론 3호가 6주 안에 잇따라 기능을 잃었고, 사비에트 자신의 소바 위성 1기도 손상되었다. 루이나는 이 실험이 궤도상의 위성을 한꺼번에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시위였다고 주장했고, 사비에트는 순수한 무기 효과 시험이었다고 반박했다. 이 실험은 결과적으로 양국이 대기권·우주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나는 1963년 8월, 사비에트는 1964년 3월 조약에 가입했고, 이것이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함께 참여한 거의 유일한 우주 관련 국제 조약이 되었다.
상세 내용은 루이나 국가정찰국 문서 참고.
4.3. 조약 밖의 궤도 (1966~1968) [편집]
1966년 12월 유엔 총회는 궤도에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배치하는 것을 금지하는 우주조약을 채택했고, 조약은 1967년 1월 27일 서명을 위해 개방되었다. 미국·소련·영국이 서명한 같은 날 루이나도 서명했다. 그러나 사비에트는 서명을 거부했다. 사비에트는 이 조약이 "두 초강대국이 궤도를 나눠 갖기 위한 문서"라고 비판했으나, 실제로는 제7설계국이 진행하던 부분궤도 폭격체계 개발이 더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본다.
사비에트가 빠진 조약을 두고 루이나 상원에서는 비준 논쟁이 벌어졌다. 반대파는 사비에트가 묶이지 않는 조약에 루이나만 묶이는 것은 일방적 무장 해제라고 주장했고, 1967년 한 해 동안 KESTREL이 포착한 사비에트의 K-7 로켓 시험 네 차례가 모두 궤도를 한 바퀴 채 돌지 않고 떨어지는 비정상적 궤적을 그렸다는 정보가 비공개 청문회에 보고되면서 반대 여론이 힘을 얻었다. 1968년 3월 14일 비준 동의안은 찬성이 재적 3분의 2에 7표 모자라 부결되었다.
이로써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모두 우주조약 체제 밖에 남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조약으로 금지한 궤도 핵무기가 랜드해협에서는 금지되지 않았다는 이 사실을 두고, 이후의 연구자들은 이 시점을 두 우주경쟁이 결정적으로 갈라진 분기점으로 본다. 이후 20년간 랜드해협의 궤도는 흔히 '조약 밖의 궤도'로 불렸다.
사비에트가 빠진 조약을 두고 루이나 상원에서는 비준 논쟁이 벌어졌다. 반대파는 사비에트가 묶이지 않는 조약에 루이나만 묶이는 것은 일방적 무장 해제라고 주장했고, 1967년 한 해 동안 KESTREL이 포착한 사비에트의 K-7 로켓 시험 네 차례가 모두 궤도를 한 바퀴 채 돌지 않고 떨어지는 비정상적 궤적을 그렸다는 정보가 비공개 청문회에 보고되면서 반대 여론이 힘을 얻었다. 1968년 3월 14일 비준 동의안은 찬성이 재적 3분의 2에 7표 모자라 부결되었다.
이로써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모두 우주조약 체제 밖에 남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조약으로 금지한 궤도 핵무기가 랜드해협에서는 금지되지 않았다는 이 사실을 두고, 이후의 연구자들은 이 시점을 두 우주경쟁이 결정적으로 갈라진 분기점으로 본다. 이후 20년간 랜드해협의 궤도는 흔히 '조약 밖의 궤도'로 불렸다.
4.4. 궤도의 검 (1966~1975) [편집]
1966년 사비에트는 로켓포병과 방공군에 흩어져 있던 우주 관련 부대를 통합해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을 독립 군종으로 창설했다. 궤도방위군이 처음으로 맡은 핵심 전력은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가 추진한 「메치(Меч)」였다. 메치는 핵탄두를 저궤도에 올려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돈 뒤 목표 상공에서 역추진해 떨어뜨리는 부분궤도 폭격체계였다. 루이나의 조기경보 레이더는 모두 사비에트가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메치는 지구를 돌아 북쪽에서 접근할 수 있었고, 고도 150km 안팎의 낮은 궤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레이더에 포착되는 시간도 짧았다. 1968년 9월 첫 부대가 실전 배치되었고, 1971년까지 사르다에 18기의 발사대가 갖춰졌다. 이는 부분궤도 폭격체계가 실전 배치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사비에트는 메치가 궤도를 한 바퀴 다 돌지 않으므로 '궤도에 배치된 무기'가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사비에트는 애초에 우주조약 당사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논리는 법적 방어라기보다는 국제 여론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루이나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가입하지 않은 조약의 허점까지 챙겼다"는 냉소가 나왔다.
루이나의 대응은 두 갈래였다. 첫째는 공군의 적외선 조기경보위성 「WATCHFIRE」였다. 1970년 11월 첫 위성이 정지궤도에 올랐고, 1975년까지 4기 체제가 갖춰졌다. WATCHFIRE는 미사일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든 발사 순간의 화염을 궤도에서 탐지했기 때문에, 메치가 노린 방향의 이점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메치가 WATCHFIRE를 낳았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둘째는 루이나도 궤도 핵무기를 가질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국방부는 1969년 4월부터 1971년 8월까지 궤도 대기 핵탄두 연구 「HIGH TIDE」를 진행했으나 최종적으로 배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정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궤도 핵탄두는 궤도 특성상 루이나 자신의 영토 위도 매일 지나가므로 고장이나 사고가 곧 자국 영토 위의 핵 사고가 될 수 있었고, 비용이 같은 수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2.6배로 추산되었으며, 무엇보다 해군이 잠수함 전력의 생존성이 궤도 무기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이 결정으로 루이나의 전략 억지력은 바다에 두고, 궤도는 그것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쓴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 지원의 핵심은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였다.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은 발사 지점의 위치가 정확해야 명중률이 보장되는데, 1964년 실용화된 LODESTAR는 잠수함이 수면 가까이에서 위성 신호를 받아 자기 위치를 산출할 수 있게 했다. 초기 오차는 약 200m였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25m까지 줄었다. LODESTAR는 이후 루이나 민간 항법의 뿌리가 되었다.
사비에트는 메치가 궤도를 한 바퀴 다 돌지 않으므로 '궤도에 배치된 무기'가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사비에트는 애초에 우주조약 당사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논리는 법적 방어라기보다는 국제 여론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루이나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가입하지 않은 조약의 허점까지 챙겼다"는 냉소가 나왔다.
루이나의 대응은 두 갈래였다. 첫째는 공군의 적외선 조기경보위성 「WATCHFIRE」였다. 1970년 11월 첫 위성이 정지궤도에 올랐고, 1975년까지 4기 체제가 갖춰졌다. WATCHFIRE는 미사일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든 발사 순간의 화염을 궤도에서 탐지했기 때문에, 메치가 노린 방향의 이점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메치가 WATCHFIRE를 낳았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둘째는 루이나도 궤도 핵무기를 가질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국방부는 1969년 4월부터 1971년 8월까지 궤도 대기 핵탄두 연구 「HIGH TIDE」를 진행했으나 최종적으로 배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정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궤도 핵탄두는 궤도 특성상 루이나 자신의 영토 위도 매일 지나가므로 고장이나 사고가 곧 자국 영토 위의 핵 사고가 될 수 있었고, 비용이 같은 수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2.6배로 추산되었으며, 무엇보다 해군이 잠수함 전력의 생존성이 궤도 무기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이 결정으로 루이나의 전략 억지력은 바다에 두고, 궤도는 그것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쓴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 지원의 핵심은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였다.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은 발사 지점의 위치가 정확해야 명중률이 보장되는데, 1964년 실용화된 LODESTAR는 잠수함이 수면 가까이에서 위성 신호를 받아 자기 위치를 산출할 수 있게 했다. 초기 오차는 약 200m였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25m까지 줄었다. LODESTAR는 이후 루이나 민간 항법의 뿌리가 되었다.
4.5. 망루와 요새 (1962~1979) [편집]
랜드해협에서 유인 우주비행은 탐험이 아니라 관측의 문제였다. 1960년대 초 양국 군부는 사람이 궤도에서 직접 표적을 고르고 촬영하면 구름과 기상 조건에 좌우되는 무인 정찰위성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봤다.
사비에트는 1962년 3월 9일 인민해방군 소령 세르게이 T. 라도프를 태운 「스트라시(Страж) 1호」를 발사했다. 라도프는 25시간 동안 궤도를 17바퀴 돌며 휴대 카메라로 루이나 함대를 촬영했고, 사비에트는 이를 "궤도 연구 비행"이라고만 짧게 발표했다. 루이나의 첫 유인 비행은 이듬해인 1963년 5월 RASA의 「메리디안(MERIDIAN)」 계획으로 이루어졌다. 해군 소령 에드워드 T. 콜먼이 탑승한 메리디안 1호는 공개적으로 진행된 민간 비행이었지만, 우주선과 발사체는 모두 군이 개발한 것이었고 탑승자 역시 해군 시험비행 조종사였다. 메리디안 계획은 1966년까지 9회 비행했다. 1964년에는 스트라시 4호의 귀환 중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인민해방군 대위 올레그 V. 수린이 사망했다.
루이나는 1964년 메리디안 이후의 계획으로 달 착륙과 군사 우주정거장 두 가지를 놓고 검토한 끝에, 1966년 8월 제21대 대통령 조지 레이먼드가 해군의 유인 궤도 관측소 계획 「CROW'S NEST」를 승인했다. 계획명은 군함 돛대 꼭대기에 있는 망루에서 따온 것으로, 해군 우주계획국장 오거스트 L. 펠프스 소장이 붙였다. 공군은 이 계획이 해군 사업이 되는 데 강하게 반발했고, 1968년 예산 협상에서 승무원 일부를 공군에서 선발하는 조건으로 합동 사업이 되었다. 대외적으로 CROW'S NEST는 RASA의 「궤도연구실(ORL)」로 발표되었다.
1969년 11월 18일 제1관측소가 궤도에 올랐고, 이틀 뒤 첫 교대 승무원 3명이 도킹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이었다. 관측소에는 대구경 정찰 카메라와 해양 감시용 레이더가 실려 있었으며, 승무원은 구름 사이로 표적이 드러나는 순간을 골라 촬영하고, 사비에트 함대의 움직임을 육안과 쌍안경으로 직접 추적해 보고했다. 1972년 2월 11일에는 교대 4차 승무원이 귀환하던 중 귀환선의 밸브가 열려 선실 압력이 빠지면서 해군 중령 조너선 A. 헤일, 해군 소령 피에르 L. 마세, 공군 대위 로버트 K. 윈 3명이 모두 사망했다. 계획은 14개월간 중단되었고, 정부는 이를 "궤도연구실 승무원 귀환 사고"로만 발표했다. 이 사고는 루이나 우주비행 사상 유일한 비행 중 사망 사고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의 대응은 제7설계국의 무장 우주정거장 「크레포스트(Крепость)」였다. 1971년 첫 정거장이 발사되었고, 1974년 궤도에 오른 크레포스트 2호에는 자기방어용 23mm 기관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1974년 12월 크레포스트 2호는 승무원이 귀환한 뒤 원격 조종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방출한 자국 표적을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다. 궤도에서 무기가 실제로 발사된 세계 최초의 사례였지만, 이 사실은 1991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77년에는 크레포스트 3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인민해방군 중령 빅토르 A. 게라시모프와 소령 안톤 P. 레베데프가 사망했다. 비행 중 사고 외에 훈련 중 사망자도 있었는데, 루이나는 1965~1974년 사이 훈련기 추락 2건과 수중 훈련 사고 1건으로 우주비행사 4명을, 사비에트는 1966년 저압실 화재로 2명을 잃었다.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의 시대는 양국에서 같은 해에 끝났다. 1979년 루이나는 군정의 예산 삭감과 무인 정찰위성의 성능 향상을 이유로 CROW'S NEST를 종료했고, 사비에트도 같은 해 크레포스트 4호 계획을 취소했다. 제1관측소부터 제3관측소까지 10년간 교대 승무원 11개 조가 궤도에 올랐으나, 결론적으로 사람의 눈은 기계의 눈보다 비쌌고 더 낫지도 않았다. 이후 제1차 경쟁이 끝날 때까지 양국 모두 군사 목적의 유인 비행을 재개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1962년 3월 9일 인민해방군 소령 세르게이 T. 라도프를 태운 「스트라시(Страж) 1호」를 발사했다. 라도프는 25시간 동안 궤도를 17바퀴 돌며 휴대 카메라로 루이나 함대를 촬영했고, 사비에트는 이를 "궤도 연구 비행"이라고만 짧게 발표했다. 루이나의 첫 유인 비행은 이듬해인 1963년 5월 RASA의 「메리디안(MERIDIAN)」 계획으로 이루어졌다. 해군 소령 에드워드 T. 콜먼이 탑승한 메리디안 1호는 공개적으로 진행된 민간 비행이었지만, 우주선과 발사체는 모두 군이 개발한 것이었고 탑승자 역시 해군 시험비행 조종사였다. 메리디안 계획은 1966년까지 9회 비행했다. 1964년에는 스트라시 4호의 귀환 중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인민해방군 대위 올레그 V. 수린이 사망했다.
루이나는 1964년 메리디안 이후의 계획으로 달 착륙과 군사 우주정거장 두 가지를 놓고 검토한 끝에, 1966년 8월 제21대 대통령 조지 레이먼드가 해군의 유인 궤도 관측소 계획 「CROW'S NEST」를 승인했다. 계획명은 군함 돛대 꼭대기에 있는 망루에서 따온 것으로, 해군 우주계획국장 오거스트 L. 펠프스 소장이 붙였다. 공군은 이 계획이 해군 사업이 되는 데 강하게 반발했고, 1968년 예산 협상에서 승무원 일부를 공군에서 선발하는 조건으로 합동 사업이 되었다. 대외적으로 CROW'S NEST는 RASA의 「궤도연구실(ORL)」로 발표되었다.
1969년 11월 18일 제1관측소가 궤도에 올랐고, 이틀 뒤 첫 교대 승무원 3명이 도킹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이었다. 관측소에는 대구경 정찰 카메라와 해양 감시용 레이더가 실려 있었으며, 승무원은 구름 사이로 표적이 드러나는 순간을 골라 촬영하고, 사비에트 함대의 움직임을 육안과 쌍안경으로 직접 추적해 보고했다. 1972년 2월 11일에는 교대 4차 승무원이 귀환하던 중 귀환선의 밸브가 열려 선실 압력이 빠지면서 해군 중령 조너선 A. 헤일, 해군 소령 피에르 L. 마세, 공군 대위 로버트 K. 윈 3명이 모두 사망했다. 계획은 14개월간 중단되었고, 정부는 이를 "궤도연구실 승무원 귀환 사고"로만 발표했다. 이 사고는 루이나 우주비행 사상 유일한 비행 중 사망 사고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의 대응은 제7설계국의 무장 우주정거장 「크레포스트(Крепость)」였다. 1971년 첫 정거장이 발사되었고, 1974년 궤도에 오른 크레포스트 2호에는 자기방어용 23mm 기관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1974년 12월 크레포스트 2호는 승무원이 귀환한 뒤 원격 조종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방출한 자국 표적을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다. 궤도에서 무기가 실제로 발사된 세계 최초의 사례였지만, 이 사실은 1991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77년에는 크레포스트 3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인민해방군 중령 빅토르 A. 게라시모프와 소령 안톤 P. 레베데프가 사망했다. 비행 중 사고 외에 훈련 중 사망자도 있었는데, 루이나는 1965~1974년 사이 훈련기 추락 2건과 수중 훈련 사고 1건으로 우주비행사 4명을, 사비에트는 1966년 저압실 화재로 2명을 잃었다.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의 시대는 양국에서 같은 해에 끝났다. 1979년 루이나는 군정의 예산 삭감과 무인 정찰위성의 성능 향상을 이유로 CROW'S NEST를 종료했고, 사비에트도 같은 해 크레포스트 4호 계획을 취소했다. 제1관측소부터 제3관측소까지 10년간 교대 승무원 11개 조가 궤도에 올랐으나, 결론적으로 사람의 눈은 기계의 눈보다 비쌌고 더 낫지도 않았다. 이후 제1차 경쟁이 끝날 때까지 양국 모두 군사 목적의 유인 비행을 재개하지 않았다.
4.6. 요격 시험 (1968~1985) [편집]
상대의 눈을 가질 수 없다면 상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양국은 위성 요격 무기를 개발했다.
사비에트의 「야스트레브(Ястреб)」는 요격체를 표적 위성과 같은 궤도에 올려 한두 바퀴 안에 1km 이내로 접근한 뒤 파편탄두를 터뜨리는 공궤도(共軌道) 요격 무기였다. 1968년 2월 자국 표적 위성을 상대로 한 시험에서 첫 요격에 성공했고, 이는 세계 최초의 위성 요격 성공이었다. 야스트레브는 1982년 6월 18일 마지막 시험까지 모두 20회 시험되어 11회 성공했으며, 사르다에 상시 발사 대기 태세가 유지되었다.
루이나는 이번에도 해군과 공군이 각자의 무기를 만들었다. 해군의「KINGFISHER」는 순양함에서 발사해 상공의 위성을 직접 타격하는 직상승 요격 미사일로, 1976년 9월 첫 시험에서 실패한 뒤 1977년 5월 고도 380km의 자국 표적 위성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공군의 AQ-7은 전투기가 고고도에서 발사하는 공중발사 요격 미사일로, 1985년 9월 26일 고도 530km에서 수명이 다한 자국 기상위성을 파괴했다. 이 시험에서 발생한 파편은 285개가 추적 목록에 올랐고, 사비에트는 이를 궤도 환경에 대한 도발로 규정했다.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수행한 위성 요격 시험은 모두 자국의 표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양국은 상대가 언제든 자국 위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상대도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알았다. 요격 시험은 파괴 그 자체보다 이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키는 행위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사비에트의 「야스트레브(Ястреб)」는 요격체를 표적 위성과 같은 궤도에 올려 한두 바퀴 안에 1km 이내로 접근한 뒤 파편탄두를 터뜨리는 공궤도(共軌道) 요격 무기였다. 1968년 2월 자국 표적 위성을 상대로 한 시험에서 첫 요격에 성공했고, 이는 세계 최초의 위성 요격 성공이었다. 야스트레브는 1982년 6월 18일 마지막 시험까지 모두 20회 시험되어 11회 성공했으며, 사르다에 상시 발사 대기 태세가 유지되었다.
루이나는 이번에도 해군과 공군이 각자의 무기를 만들었다. 해군의「KINGFISHER」는 순양함에서 발사해 상공의 위성을 직접 타격하는 직상승 요격 미사일로, 1976년 9월 첫 시험에서 실패한 뒤 1977년 5월 고도 380km의 자국 표적 위성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공군의 AQ-7은 전투기가 고고도에서 발사하는 공중발사 요격 미사일로, 1985년 9월 26일 고도 530km에서 수명이 다한 자국 기상위성을 파괴했다. 이 시험에서 발생한 파편은 285개가 추적 목록에 올랐고, 사비에트는 이를 궤도 환경에 대한 도발로 규정했다.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수행한 위성 요격 시험은 모두 자국의 표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양국은 상대가 언제든 자국 위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상대도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알았다. 요격 시험은 파괴 그 자체보다 이 사실을 서로에게 확인시키는 행위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4.7. 전쟁 속의 궤도 (1970~1980) [편집]
1970년 제22대 대통령 아서 W. 그랜트 정부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루이나가 정찰위성의 지원을 받으며 치른 첫 전쟁이었다. 그러나 필름 회수 방식의 KESTREL은 촬영부터 분석까지 5~9일이 걸렸고, 사진이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전술 표적은 이미 이동한 뒤였다. 이 경험은 루이나 군부에 '느린 눈은 전쟁에서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1971년 광역 촬영 위성 「GYRFALCON」과 이후 전자식 영상 전송 위성 개발로 이어졌다.
1974~1977년의 청북전쟁에서 궤도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장 지원 수단이 되었다. 루이나는 공식 참전 이전인 1974년부터 북산에 정보위성 자료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했고, 1975년 9월 직접 참전한 뒤에는 WATCHFIRE와 해군의 해양감시위성 「PICKET」이 사비에트 함대의 움직임을 상시 추적했다. 사비에트는 1975년 한 해에만 소바 정찰위성 41기를 발사해 해협과 청평 인근 해역의 루이나 함대를 감시했는데, 이는 사비에트의 연간 정찰위성 발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가 이 영상을 청평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전쟁 기간 내내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976년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GYRFALCON 위성 1기가 사비에트 내륙의 타르칸 고원 상공을 세 차례 지나는 동안, 위성에 실린 광량 감지기에 포화 기록이 남았고 이후 회수된 필름의 해당 구간도 강한 빛에 과다 노출되어 있었다. 루이나 정보당국 안에서는 사비에트가 지상 레이저로 위성의 눈을 멀게 하는 시험을 했다는 견해와, 인근 가스전의 대형 화재가 원인이라는 견해가 맞섰다. 1977년 국방부는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6년 부분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분석관 5명 가운데 3명이 레이저 쪽에 무게를 두었다. 사비에트는 이 타르칸 섬광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루이나는 정찰위성의 센서에 강한 빛을 차단하는 자동 셔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1978년 군정이 성립하면서 궤도는 국내로도 향할 뻔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국가비상위원회가 1979년 3월과 1980년 10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정찰국에 국내 시위 지역의 촬영을 요구한 문서를 확인했다. 국가정찰국은 두 건을 거부했고, 한 건은 해상도가 낮은 기상위성 영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조사위원회는 정찰위성이 국내 사찰에 직접 쓰였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요구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군정은 또한 우주예산을 18% 삭감했는데, CROW'S NEST 종료는 이 삭감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1974~1977년의 청북전쟁에서 궤도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장 지원 수단이 되었다. 루이나는 공식 참전 이전인 1974년부터 북산에 정보위성 자료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했고, 1975년 9월 직접 참전한 뒤에는 WATCHFIRE와 해군의 해양감시위성 「PICKET」이 사비에트 함대의 움직임을 상시 추적했다. 사비에트는 1975년 한 해에만 소바 정찰위성 41기를 발사해 해협과 청평 인근 해역의 루이나 함대를 감시했는데, 이는 사비에트의 연간 정찰위성 발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가 이 영상을 청평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전쟁 기간 내내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976년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GYRFALCON 위성 1기가 사비에트 내륙의 타르칸 고원 상공을 세 차례 지나는 동안, 위성에 실린 광량 감지기에 포화 기록이 남았고 이후 회수된 필름의 해당 구간도 강한 빛에 과다 노출되어 있었다. 루이나 정보당국 안에서는 사비에트가 지상 레이저로 위성의 눈을 멀게 하는 시험을 했다는 견해와, 인근 가스전의 대형 화재가 원인이라는 견해가 맞섰다. 1977년 국방부는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6년 부분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분석관 5명 가운데 3명이 레이저 쪽에 무게를 두었다. 사비에트는 이 타르칸 섬광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루이나는 정찰위성의 센서에 강한 빛을 차단하는 자동 셔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1978년 군정이 성립하면서 궤도는 국내로도 향할 뻔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국가비상위원회가 1979년 3월과 1980년 10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정찰국에 국내 시위 지역의 촬영을 요구한 문서를 확인했다. 국가정찰국은 두 건을 거부했고, 한 건은 해상도가 낮은 기상위성 영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조사위원회는 정찰위성이 국내 사찰에 직접 쓰였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요구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군정은 또한 우주예산을 18% 삭감했는데, CROW'S NEST 종료는 이 삭감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4.8. 정지궤도 위기 (1981~1984) [편집]
1981년 1월 24일 사비에트의 원자로 탑재 레이더 해양감시위성 「볼나(Волна) 14호」가 원자로를 폐기 궤도로 올려 보내는 데 실패하고 대기권에 재돌입했다. 잔해는 루이나 북부 헤이스팅스 시 관할 삼림지대에 약 600km에 걸쳐 흩어졌고, 루이나는 4개월에 걸친 수색 작전 「GLEANER」로 방사성 파편 47점을 회수했다. 루이나는 회수 비용 1,380만 달러를 사비에트에 청구했고, 사비에트는 1983년 그 가운데 41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 볼나 14호 추락 사건은 사비에트의 궤도 활동이 루이나 영토에 물리적 피해를 입힌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1984년 마테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비에트는 교전 당사국이 아니었지만, 루이나군 전체가 전시 태세에 들어가 있었고 양국의 경계 수위도 높아져 있었다. 이 와중인 1984년 5월 11일, 사비에트가 정지궤도에 올린 「궤도 연구 위성 1127호」가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4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9일째 되는 날 두 위성 사이의 거리는 40km까지 좁혀졌다.
해협의 7분이라는 조건에서 조기경보위성은 전략 억지력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루이나 국방부는 1127호가 정지궤도 요격 무기의 시험이거나, 최악의 경우 선제공격에 앞서 루이나의 눈을 멀게 하려는 사전 작업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경계태세를 2단계로 올렸고, 해군은 항구에 있던 전략잠수함 9척을 긴급 출항시켰다. 사비에트는 루이나 전략잠수함의 대규모 출항을 선제공격 준비로 해석해 궤도방위군과 전략로켓부대의 경계 수위를 올렸다. 양측은 1965년 개설된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모두 17차례 교신했고, 사비에트는 1127호가 추진기 고장으로 표류 중인 통신위성 시험기라고 설명했다. 12일째인 5월 23일 1127호는 추진기를 가동해 WATCHFIRE 4호로부터 멀어졌고, 양국은 차례로 경계태세를 해제했다.
1127호의 정체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2004년 기밀 해제된 루이나 문서는 1127호가 정지궤도 근접 기동 능력을 시험하던 사찰 위성이었다고 결론지었고, 2011년 출간된 전직 사비에트 궤도방위군 장교의 회고록은 1127호가 30km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도록 사전에 계획된 '능력 과시'였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이 정지궤도 위기는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궤도 문제로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으로 평가된다. 위기를 겪은 양국 군부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7분의 세계에서 조기경보위성에 접근하는 행위는 공격 준비와 구별할 수 없으며, 구별할 수 없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4년 마테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비에트는 교전 당사국이 아니었지만, 루이나군 전체가 전시 태세에 들어가 있었고 양국의 경계 수위도 높아져 있었다. 이 와중인 1984년 5월 11일, 사비에트가 정지궤도에 올린 「궤도 연구 위성 1127호」가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4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9일째 되는 날 두 위성 사이의 거리는 40km까지 좁혀졌다.
해협의 7분이라는 조건에서 조기경보위성은 전략 억지력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루이나 국방부는 1127호가 정지궤도 요격 무기의 시험이거나, 최악의 경우 선제공격에 앞서 루이나의 눈을 멀게 하려는 사전 작업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경계태세를 2단계로 올렸고, 해군은 항구에 있던 전략잠수함 9척을 긴급 출항시켰다. 사비에트는 루이나 전략잠수함의 대규모 출항을 선제공격 준비로 해석해 궤도방위군과 전략로켓부대의 경계 수위를 올렸다. 양측은 1965년 개설된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모두 17차례 교신했고, 사비에트는 1127호가 추진기 고장으로 표류 중인 통신위성 시험기라고 설명했다. 12일째인 5월 23일 1127호는 추진기를 가동해 WATCHFIRE 4호로부터 멀어졌고, 양국은 차례로 경계태세를 해제했다.
1127호의 정체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2004년 기밀 해제된 루이나 문서는 1127호가 정지궤도 근접 기동 능력을 시험하던 사찰 위성이었다고 결론지었고, 2011년 출간된 전직 사비에트 궤도방위군 장교의 회고록은 1127호가 30km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도록 사전에 계획된 '능력 과시'였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이 정지궤도 위기는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양국이 궤도 문제로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으로 평가된다. 위기를 겪은 양국 군부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7분의 세계에서 조기경보위성에 접근하는 행위는 공격 준비와 구별할 수 없으며, 구별할 수 없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4.9. 센츄리움 궤도협정 (1985~1987) [편집]
1985년 11월 중립국 센츄리움에서 양국의 궤도 군비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은 두 달 전 루이나 공군의 AQ-7 시험 때문에 한때 무산될 뻔했으나, 14차례의 회담을 거쳐 1987년 10월 21일 제25대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와 사비에트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니콜라이 S. 트로핀이 센츄리움 궤도협정에 서명했다. 루이나 상원은 1988년 3월, 사비에트 최고인민평의회는 같은 해 4월 협정을 비준했고, 협정은 1988년 6월 1일 발효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궤도 및 부분궤도에 핵무기를 배치하거나 시험하는 행위 금지(제2조)
- 조기경보위성과 직통선 통신위성을 '보호 위성'으로 지정하고, 이에 대한 파괴·접근·방해 금지(제3조)
- 궤도에 파편을 남기는 위성 요격 시험 금지(제4조)
- 궤도 투입 목적의 모든 발사를 72시간 전에 상대국에 통보(제5조)
- 자국 우주물체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의 제거 절차(제6조)
- 이행 감독을 위한 센츄리움 상설협의위원회 설치(제8조)
협정의 핵심은 제3조였다.
센츄리움 궤도협정 제3조(보호 위성)
① 각 당사국은 부속서 1에 등재된 상대 당사국의 위성(이하 "보호 위성"이라 한다)을 파괴하거나 손상하여서는 아니 되며, 그 기능을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각 당사국은 자국의 우주물체를 보호 위성으로부터 정지궤도에서는 50킬로미터, 그 밖의 궤도에서는 25킬로미터 이내로 접근시켜서는 아니 된다. 다만, 상대 당사국의 사전 동의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③ 보호 위성을 향한 레이저 조사, 전파 방해 및 이에 준하는 행위는 제1항의 방해로 본다.
④ 각 당사국은 매년 1월 1일 부속서 1을 갱신하여 상대 당사국에 통보한다. 부속서 1에 새로 등재하는 위성은 조기경보 또는 직통 통신을 주된 임무로 하는 것에 한한다.
① 각 당사국은 부속서 1에 등재된 상대 당사국의 위성(이하 "보호 위성"이라 한다)을 파괴하거나 손상하여서는 아니 되며, 그 기능을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각 당사국은 자국의 우주물체를 보호 위성으로부터 정지궤도에서는 50킬로미터, 그 밖의 궤도에서는 25킬로미터 이내로 접근시켜서는 아니 된다. 다만, 상대 당사국의 사전 동의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③ 보호 위성을 향한 레이저 조사, 전파 방해 및 이에 준하는 행위는 제1항의 방해로 본다.
④ 각 당사국은 매년 1월 1일 부속서 1을 갱신하여 상대 당사국에 통보한다. 부속서 1에 새로 등재하는 위성은 조기경보 또는 직통 통신을 주된 임무로 하는 것에 한한다.
협정에 따라 사비에트는 메치 발사대 18기를 해체했고, 해체 작업은 1990년 5월 루이나 측의 여섯 차례 현장 사찰을 거쳐 완료가 확인되었다. 반면 협정은 위성 요격 무기의 보유, 파편을 남기지 않는 요격 시험, 정찰위성 운용, 보호 위성이 아닌 위성에 대한 전파 방해는 금지하지 않았다. 협정의 목적은 궤도의 비무장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약속이었고, 이 점에서 협정은 제1차 경쟁을 끝낸 문서인 동시에 제2차 경쟁의 여지를 남긴 문서이기도 했다.
상세 내용은 센츄리움 궤도협정 문서 참고.
5. 궤도의 휴전 (1987~2002) [편집]
센츄리움 궤도협정 발효 이후 약 15년간 랜드해협의 궤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1990년 메치 해체가 완료되었고, 1991년에는 양국이 각자 추적하던 궤도 물체 목록을 정기적으로 교환하는 부속 합의가 체결되었다. 이는 상대의 위성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추적망이 처음으로 충돌 회피라는 공동의 목적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기밀도 일부 공개되었다. 사비에트는 1989년 사르다 발사장 참사를, 1991년 크레포스트 2호의 궤도 사격 시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루이나는 1992년 국가정찰국의 존재를 공식 인정했고, 1998년에는 KESTREL 사진 약 71만 장을 기밀 해제했다. 이 사진들은 이후 해협 연안의 토지 이용 변화와 산림 변화를 연구하는 환경사 연구의 1차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다.
군사 우주예산이 줄어든 자리는 과학과 민간이 채웠다. 1990년대는 RASA의 행성 탐사와 지구 관측 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1996년 루이나는 해군의 LODESTAR 신호를 민간에 전면 개방해 선박·항공기·차량 항법에 쓸 수 있게 했다. 루이나의 민간 발사 사업과 상업 위성 영상 사업도 이 무렵 시작되었다.
그러나 휴전은 무장 해제가 아니었다. 협정은 상대의 눈을 찌르는 행위와 파편을 남기는 시험을 금지했을 뿐 그 밖의 준비는 막지 않았고, 양국은 협정의 문턱 아래에서 지상 레이저, 전파 방해 장비, 궤도 기동이 가능한 소형 위성 같은 비파괴형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1990년대 후반 루이나 국방부의 한 내부 보고서는 이 상황을 "협정은 칼을 뽑는 것을 금지했지 칼을 가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고 요약했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기밀도 일부 공개되었다. 사비에트는 1989년 사르다 발사장 참사를, 1991년 크레포스트 2호의 궤도 사격 시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루이나는 1992년 국가정찰국의 존재를 공식 인정했고, 1998년에는 KESTREL 사진 약 71만 장을 기밀 해제했다. 이 사진들은 이후 해협 연안의 토지 이용 변화와 산림 변화를 연구하는 환경사 연구의 1차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다.
군사 우주예산이 줄어든 자리는 과학과 민간이 채웠다. 1990년대는 RASA의 행성 탐사와 지구 관측 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1996년 루이나는 해군의 LODESTAR 신호를 민간에 전면 개방해 선박·항공기·차량 항법에 쓸 수 있게 했다. 루이나의 민간 발사 사업과 상업 위성 영상 사업도 이 무렵 시작되었다.
그러나 휴전은 무장 해제가 아니었다. 협정은 상대의 눈을 찌르는 행위와 파편을 남기는 시험을 금지했을 뿐 그 밖의 준비는 막지 않았고, 양국은 협정의 문턱 아래에서 지상 레이저, 전파 방해 장비, 궤도 기동이 가능한 소형 위성 같은 비파괴형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1990년대 후반 루이나 국방부의 한 내부 보고서는 이 상황을 "협정은 칼을 뽑는 것을 금지했지 칼을 가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고 요약했다.
6. 신우주경쟁 (2002~현재) [편집]
6.1. 협정의 균열 [편집]
2002년 루이나 국방부는 미사일방어국 주도로 해상 기반 중간단계 요격 체계의 개발에 착수했다. 탄도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요격하는 이 체계는 기술적으로 저궤도 위성도 요격할 수 있었고, 사비에트는 즉각 이를 "이름만 바꾼 KINGFISHER"라고 비난했다. 루이나는 미사일 방어는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2008년 7월 루이나 해군은 고장으로 통제를 잃은 국가정찰국 위성 L-217을 해상 기반 요격 미사일로 고도 247km에서 격추했다. 루이나는 위성에 실린 450kg의 독성 추진제가 인구 밀집 지역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며 자국 물체의 안전 제거를 허용한 협정 제6조를 근거로 들었고, 발사 72시간 전에 사비에트에 통보했다. 파편 대부분은 40일 안에 대기권에서 소멸했다. 사비에트는 이것이 안전 조치를 가장한 위성 요격 시험이며, 파편 생성 요격 시험을 금지한 제4조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에는 보호 위성 목록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다. 루이나가 부속서 1에 새로 등재한 차세대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III가 조기경보뿐 아니라 미사일 방어의 표적 추적 기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에트는 이 위성이 제3조 제4항의 '조기경보를 주된 임무로 하는' 위성이 아니라며 등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루이나 역시 보복성으로 사비에트의 신형 조기경보위성 등재에 이의를 제기했다. 양국이 서로의 눈을 보호하기로 약속한 조항이, 눈이 무엇인지를 두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 9월 3일 사비에트는 지상에서 발사한 요격 미사일로 고도 830km의 자국 퇴역 기상위성을 파괴했다. 추적 목록에 오른 파편만 2,100개가 넘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수십 년간 궤도에 남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사비에트는 이것이 시험이 아니라 퇴역 위성의 폐기이며, 따라서 제4조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013년 6월 17일 사비에트는 루이나의 미사일 방어 체계가 협정의 근간을 훼손했다며 센츄리움 궤도협정 탈퇴를 통보했고, 탈퇴는 6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17일 효력을 발생했다.
2008년 7월 루이나 해군은 고장으로 통제를 잃은 국가정찰국 위성 L-217을 해상 기반 요격 미사일로 고도 247km에서 격추했다. 루이나는 위성에 실린 450kg의 독성 추진제가 인구 밀집 지역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며 자국 물체의 안전 제거를 허용한 협정 제6조를 근거로 들었고, 발사 72시간 전에 사비에트에 통보했다. 파편 대부분은 40일 안에 대기권에서 소멸했다. 사비에트는 이것이 안전 조치를 가장한 위성 요격 시험이며, 파편 생성 요격 시험을 금지한 제4조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에는 보호 위성 목록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다. 루이나가 부속서 1에 새로 등재한 차세대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III가 조기경보뿐 아니라 미사일 방어의 표적 추적 기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에트는 이 위성이 제3조 제4항의 '조기경보를 주된 임무로 하는' 위성이 아니라며 등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루이나 역시 보복성으로 사비에트의 신형 조기경보위성 등재에 이의를 제기했다. 양국이 서로의 눈을 보호하기로 약속한 조항이, 눈이 무엇인지를 두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 9월 3일 사비에트는 지상에서 발사한 요격 미사일로 고도 830km의 자국 퇴역 기상위성을 파괴했다. 추적 목록에 오른 파편만 2,100개가 넘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수십 년간 궤도에 남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사비에트는 이것이 시험이 아니라 퇴역 위성의 폐기이며, 따라서 제4조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013년 6월 17일 사비에트는 루이나의 미사일 방어 체계가 협정의 근간을 훼손했다며 센츄리움 궤도협정 탈퇴를 통보했고, 탈퇴는 6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17일 효력을 발생했다.
6.2. 그림자 위성 [편집]
협정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제3조의 접근 금지 구역이었다. 2015년 3월 사비에트의 정지궤도 사찰 위성 「텐(Тень)」 2호가 WATCHFIRE III 1호로부터 12km 거리까지 접근해 7주간 머물렀다. 1984년 40km 접근에 전략잠수함 9척이 출항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경계태세가 발령되지 않았다. 루이나는 외교 경로로 항의하는 데 그쳤고, 이 대조는 30년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자주 인용된다. 조기경보가 여러 궤도와 여러 위성에 분산되면서 위성 한 기에 대한 위협이 더 이상 억지력 전체에 대한 위협이 아니게 된 것이다.
루이나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2016년 루이나 공군은 정지궤도 감시 위성 「LAMPLIGHTER」의 존재를 공개했는데, 이 위성의 임무는 정지궤도를 오르내리며 사비에트 위성에 근접해 그 형상과 기능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후 양국의 위성이 서로의 위성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위성' 활동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루이나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루이나 위성에 대한 사비에트 위성의 근접 접근은 23건으로 집계되었다.
비파괴형 방해를 둘러싼 의혹도 늘었다. 2017년 루이나는 자국 정찰위성 2기가 사비에트 상공에서 레이저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증거를 공개하지 않았고, 2018년부터는 해협을 지나는 민간 선박들이 LODESTAR 신호 교란을 잇따라 신고했다. 교란 발신원은 해협 남안의 사비에트 해안 지역으로 추정되었지만, 루이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신 주체를 특정하지 않았다.
루이나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2016년 루이나 공군은 정지궤도 감시 위성 「LAMPLIGHTER」의 존재를 공개했는데, 이 위성의 임무는 정지궤도를 오르내리며 사비에트 위성에 근접해 그 형상과 기능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후 양국의 위성이 서로의 위성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위성' 활동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루이나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루이나 위성에 대한 사비에트 위성의 근접 접근은 23건으로 집계되었다.
비파괴형 방해를 둘러싼 의혹도 늘었다. 2017년 루이나는 자국 정찰위성 2기가 사비에트 상공에서 레이저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증거를 공개하지 않았고, 2018년부터는 해협을 지나는 민간 선박들이 LODESTAR 신호 교란을 잇따라 신고했다. 교란 발신원은 해협 남안의 사비에트 해안 지역으로 추정되었지만, 루이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신 주체를 특정하지 않았다.
6.3. 우주군의 시대 [편집]
2019년 12월 9일 루이나는 루이나 우주군을 창설했다. 1958년 항공우주법이 남긴 공백, 즉 어느 군이 우주를 맡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61년 만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공군의 조기경보·발사 전력과 해군의 항법·해양감시 전력이 우주군 우주작전사령부 아래로 이관되었다. 해군은 마지막까지 이관에 반대했고, 해양감시위성 자료의 1차 분석권은 결국 해군정보부(ONI)에 남았다.[4]
이후 2020년 7월 24일 콜마르 헤이든 우주군기지에 우주 영역의 정보·감시·정찰을 맡는 스페이스 델타7이, 2021년 6월 24일 톨루즈 앨드리치 우주군기지에 외국 우주 전력을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루이나 국가우주정보센터가 창설되었다. 두 부대의 핵심 임무는 상대 위성의 접근이 정비인지, 사찰인지, 요격 시험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 루이나가 12일 동안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상시적으로 답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평가가 있다.
사비에트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1966년부터 독립 군종이었던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은 2015년 공군과 통합되어 항공우주군으로 재편되었다. 루이나가 60년 동안 흩어져 있던 우주 전력을 하나로 떼어 내는 사이, 사비에트는 50년 동안 따로 있던 우주 전력을 다시 합친 셈이다. 사비에트 국방인민위원회는 궤도 방어와 방공·미사일 방어가 하나의 연속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통합의 이유로 들었다.
2022년 루이나는 파편을 남기는 직상승 위성 요격 시험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비에트는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루이나의 선언이 이미 시험을 끝낸 쪽의 선언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이후 2020년 7월 24일 콜마르 헤이든 우주군기지에 우주 영역의 정보·감시·정찰을 맡는 스페이스 델타7이, 2021년 6월 24일 톨루즈 앨드리치 우주군기지에 외국 우주 전력을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루이나 국가우주정보센터가 창설되었다. 두 부대의 핵심 임무는 상대 위성의 접근이 정비인지, 사찰인지, 요격 시험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 루이나가 12일 동안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상시적으로 답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평가가 있다.
상세 내용은 루이나 우주군 문서 참고.
사비에트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1966년부터 독립 군종이었던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은 2015년 공군과 통합되어 항공우주군으로 재편되었다. 루이나가 60년 동안 흩어져 있던 우주 전력을 하나로 떼어 내는 사이, 사비에트는 50년 동안 따로 있던 우주 전력을 다시 합친 셈이다. 사비에트 국방인민위원회는 궤도 방어와 방공·미사일 방어가 하나의 연속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통합의 이유로 들었다.
2022년 루이나는 파편을 남기는 직상승 위성 요격 시험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비에트는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루이나의 선언이 이미 시험을 끝낸 쪽의 선언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6.4. 현재 [편집]
2020년대 들어 궤도의 구도는 다시 바뀌고 있다. 루이나 민간 기업들이 운용하는 수천 기 규모의 저궤도 통신·영상 위성군은 평시에는 상업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유사시에는 군의 통신과 정찰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도록 계약되어 있다. 사비에트는 국영 위성군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위성 수가 수백, 수천 기로 늘어나면서 개별 위성을 요격하는 것의 군사적 의미는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민간 위성이 군사 표적이 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쟁점이 되었다.
2024년 양국은 센츄리움에서 '궤도 행동 규범'에 관한 협의를 11년 만에 재개했다. 협의는 근접 접근 시 사전 통보, 파편 생성 시험 금지, 조기경보 기능의 상호 보호를 의제로 삼았으나, 무엇을 조기경보 위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2009년의 문제에 다시 부딪혀 2025년 이후 중단된 상태다. 2026년 현재까지 양국은 상대국의 위성을 파괴한 적이 없다.
2024년 양국은 센츄리움에서 '궤도 행동 규범'에 관한 협의를 11년 만에 재개했다. 협의는 근접 접근 시 사전 통보, 파편 생성 시험 금지, 조기경보 기능의 상호 보호를 의제로 삼았으나, 무엇을 조기경보 위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2009년의 문제에 다시 부딪혀 2025년 이후 중단된 상태다. 2026년 현재까지 양국은 상대국의 위성을 파괴한 적이 없다.
7. 특징 [편집]
7.1. 군종의 경쟁과 설계국의 경쟁 [편집]
루이나의 우주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군과 공군의 경쟁이었다. 1958년 항공우주법이 군사 우주를 국방부에 맡기면서도 담당 군을 정하지 않았고, 이후 모든 주요 사업이 두 군의 주도권 다툼 끝에 타협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1961년 국가정찰국의 설립, KESTREL의 공중·해상 회수 병행, 1968년 CROW'S NEST의 합동 사업화,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이라는 두 개의 위성 요격 무기가 모두 그 산물이다.
이 경쟁에서 대체로 우위를 점한 쪽은 해군이었다. 루이나의 첫 위성, 첫 전자정찰위성, 항법위성, 해양감시위성, 유인 궤도 관측소가 모두 해군 사업이었고, 1971년 HIGH TIDE 기각으로 전략 억지력의 중심이 바다에 놓이면서 궤도는 해군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루이나 군 내에서 해군과 해군정보부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은 우주개발의 방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독립 우주군의 창설이 2019년까지 늦어진 것도 해군이 자신의 궤도 자산을 내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사비에트는 사정이 달랐다. 궤도방위군은 1966년에 이미 독립 군종으로 창설되었고, 군사 우주는 처음부터 국방인민위원회 아래 하나의 지휘 체계로 묶여 있었다. 대신 사비에트의 경쟁은 설계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과학 위성과 정찰위성, 유인 비행을 중시한 발렌틴 P. 오를로프의 제1설계국과, 부분궤도 폭격체계와 무장 정거장, 위성 요격 무기를 밀어붙인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의 제7설계국은 예산과 발사 순서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8년 오를로프가 사망한 뒤 제7설계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사비에트 우주개발이 가장 공격적인 형태를 띤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때문에 루이나에서는 "루이나는 군복이 싸웠고, 사비에트는 도면이 싸웠다"는 말이 쓰인다.
이 경쟁에서 대체로 우위를 점한 쪽은 해군이었다. 루이나의 첫 위성, 첫 전자정찰위성, 항법위성, 해양감시위성, 유인 궤도 관측소가 모두 해군 사업이었고, 1971년 HIGH TIDE 기각으로 전략 억지력의 중심이 바다에 놓이면서 궤도는 해군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루이나 군 내에서 해군과 해군정보부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은 우주개발의 방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독립 우주군의 창설이 2019년까지 늦어진 것도 해군이 자신의 궤도 자산을 내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사비에트는 사정이 달랐다. 궤도방위군은 1966년에 이미 독립 군종으로 창설되었고, 군사 우주는 처음부터 국방인민위원회 아래 하나의 지휘 체계로 묶여 있었다. 대신 사비에트의 경쟁은 설계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과학 위성과 정찰위성, 유인 비행을 중시한 발렌틴 P. 오를로프의 제1설계국과, 부분궤도 폭격체계와 무장 정거장, 위성 요격 무기를 밀어붙인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의 제7설계국은 예산과 발사 순서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8년 오를로프가 사망한 뒤 제7설계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사비에트 우주개발이 가장 공격적인 형태를 띤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때문에 루이나에서는 "루이나는 군복이 싸웠고, 사비에트는 도면이 싸웠다"는 말이 쓰인다.
7.2. 민간이라는 외피 [편집]
루이나 항공우주국은 법적으로 평화적 목적의 활동만 수행하는 민간 기관이었지만, 제1차 경쟁 기간 동안 사실상 루이나 군사 우주의 공개적인 얼굴 역할을 했다. TIDEMARK는 RASA의 태양복사 관측위성 SRO로, CROW'S NEST는 RASA의 궤도연구실로 발표되었고, 메리디안 계획의 우주비행사들도 모두 현역 군인이었다. RASA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위성의 실제 임무를 모른다는 불만이 오래 이어졌으며, 1972년 CROW'S NEST 사고 당시 RASA 대변인이 사망한 승무원들의 실제 소속을 알지 못한 채 브리핑에 나선 일은 이후 RASA 내부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반면 사비에트에는 이런 외피가 없었다. 첫 위성 이후 모든 군사 위성은 「궤도 연구 위성」이라는 이름 아래 일련번호만 붙은 채 발표되었고, 사비에트는 굳이 과학 위성으로 위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루이나가 군사 위성을 과학 위성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면, 사비에트는 모든 위성을 똑같이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반면 사비에트에는 이런 외피가 없었다. 첫 위성 이후 모든 군사 위성은 「궤도 연구 위성」이라는 이름 아래 일련번호만 붙은 채 발표되었고, 사비에트는 굳이 과학 위성으로 위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루이나가 군사 위성을 과학 위성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면, 사비에트는 모든 위성을 똑같이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7.3. 심우주와 전략화 [편집]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목표로 흔히 심우주 개발과 전략화가 함께 거론되는 것은, 양국의 심우주 활동 역시 대부분 전략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나가 1965년 RASA의 행성 탐사를 위해 건설한 심우주 통신망 3개 기지는 탐사선과 교신하는 동시에 고궤도와 정지궤도의 사비에트 물체를 추적하는 데 쓰였다. 1968년 RASA의 달 궤도 탐사선이 수집한 궤도 추적 자료는 지구 중력장 모델을 정밀화하는 데에도 활용되었고, 이 모델은 루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명중률 향상에 직접 기여했다.
사비에트 측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인민해방군 일부가 달 표면에 해협을 감시하는 관측 기지를 세우자는 구상을 내놓았으나, 1967년 국방인민위원회 검토에서 비용 대비 효용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복용 핵탄두를 지상 공격이 닿지 않는 고궤도에 대기시키는 이른바 '먼 궤도' 구상도 검토되었는데, 탄두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7분의 논리와 정면으로 어긋났고 역시 채택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국에서 심우주는 무기를 두는 곳이 아니라 궤도 전력을 더 멀리서 보고, 더 정확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였다.
사비에트 측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인민해방군 일부가 달 표면에 해협을 감시하는 관측 기지를 세우자는 구상을 내놓았으나, 1967년 국방인민위원회 검토에서 비용 대비 효용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1970년대에는 보복용 핵탄두를 지상 공격이 닿지 않는 고궤도에 대기시키는 이른바 '먼 궤도' 구상도 검토되었는데, 탄두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7분의 논리와 정면으로 어긋났고 역시 채택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국에서 심우주는 무기를 두는 곳이 아니라 궤도 전력을 더 멀리서 보고, 더 정확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였다.
7.4. 신비와 궤도 [편집]
신비의 발현은 능력자의 뇌에서 발생하는 AIM 확산역장을 매개로 하며, 이 역장은 측정 가능한 전자기 신호를 동반한다.[5] 1960년대 중반 양국은 이 신호를 궤도에서 탐지할 수 있는지를 검토했다. 발상은 핵실험 탐지 위성과 같았다. 레벨 5 능력자는 국가 전략급 자산으로 분류되므로, 그 발현을 궤도에서 포착할 수 있다면 상대국의 전략급 능력자 운용과 시험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이나는 1967년 국가정찰국 주도로 「PENUMBRA」를, 사비에트는 비슷한 시기 「에호(Эхо)」를 착수했다.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개별 능력자의 AIM 확산역장은 거리에 따라 급격히 감쇠해 수백 km 상공에서는 배경 잡음과 구별되지 않았고, 레벨 5 능력자가 최대 출력으로 발현할 때 생기는 전리층과 지자기의 국지적 교란만이 간접적으로 포착되었다. PENUMBRA는 1971년부터 1989년까지 후보 사례 14건을 기록해 이 가운데 5건을 발현으로 확인했는데, 그중 3건은 루이나 자신의 시험이었다. 이 때문에 PENUMBRA의 실제 효용은 무엇을 찾아내는 것보다 상대가 대규모 시험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대로 능력자가 궤도의 물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이루어졌다. 1969년 루이나 국방부의 비공개 연구는 알려진 AIM 확산역장의 유효 범위가 저궤도 고도에 비해 두 자릿수 이상 짧다는 점을 들어, 능력자를 이용한 위성 무력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사비에트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1990년대 양국 전문가 교류를 통해 확인되었다. 신비는 궤도의 무기가 되지 못했지만, 앞서 언급한 계측 기술을 통해 양국 위성의 센서 성능을 끌어올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우주경쟁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CROW'S NEST 승무원 선발에서는 AIM 확산역장이 관측소의 정밀 계측 장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레벨 2 이상의 능력자가 배제되었다.
PENUMBRA와 그 후속 체계는 현재도 일부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으며, 그 자료는 AEC-OCA에도 제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나는 1967년 국가정찰국 주도로 「PENUMBRA」를, 사비에트는 비슷한 시기 「에호(Эхо)」를 착수했다.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개별 능력자의 AIM 확산역장은 거리에 따라 급격히 감쇠해 수백 km 상공에서는 배경 잡음과 구별되지 않았고, 레벨 5 능력자가 최대 출력으로 발현할 때 생기는 전리층과 지자기의 국지적 교란만이 간접적으로 포착되었다. PENUMBRA는 1971년부터 1989년까지 후보 사례 14건을 기록해 이 가운데 5건을 발현으로 확인했는데, 그중 3건은 루이나 자신의 시험이었다. 이 때문에 PENUMBRA의 실제 효용은 무엇을 찾아내는 것보다 상대가 대규모 시험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반대로 능력자가 궤도의 물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이루어졌다. 1969년 루이나 국방부의 비공개 연구는 알려진 AIM 확산역장의 유효 범위가 저궤도 고도에 비해 두 자릿수 이상 짧다는 점을 들어, 능력자를 이용한 위성 무력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사비에트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1990년대 양국 전문가 교류를 통해 확인되었다. 신비는 궤도의 무기가 되지 못했지만, 앞서 언급한 계측 기술을 통해 양국 위성의 센서 성능을 끌어올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우주경쟁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CROW'S NEST 승무원 선발에서는 AIM 확산역장이 관측소의 정밀 계측 장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레벨 2 이상의 능력자가 배제되었다.
PENUMBRA와 그 후속 체계는 현재도 일부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으며, 그 자료는 AEC-OCA에도 제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미소 우주경쟁과의 비교 [편집]
구분 | 미소 우주경쟁 | 랜드해협 우주경쟁 |
목표 | 최초 달성·체제 선전 | 궤도 통제 |
상징 | 달 착륙 | 조기경보위성 |
유인 비행 | 탐사·위신 | 군사 관측 |
공개성 | 대부분 공개 | 대부분 기밀 |
궤도 핵무기 | 1967년 금지 | 1987년까지 배치 |
경고 시간 | 약 30분 | 약 7분 |
마무리 | 1975년 공동 비행 | 1987년 궤도협정 |
두 경쟁은 같은 시기에 진행되었고 기술적으로도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무엇을 성과로 볼 것인가라는 기준이 달랐다. 미소 경쟁의 성과는 세계가 볼 수 있어야 의미가 있었던 반면, 랜드해협 경쟁의 성과는 상대가 모를수록 의미가 있었다. 미소 경쟁이 1975년 두 나라의 우주선이 궤도에서 도킹하는 공동 비행으로 마무리되었다면, 랜드해협 경쟁은 1987년 서로의 위성에 50km 이내로 다가가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자가 궤도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났다면, 후자는 궤도에서 만나지 않는 것으로 끝난 셈이다.
8.1. 왜 달에 가지 않았는가 [편집]
랜드해협 우주경쟁을 다룰 때 자주 제기되는 질문은, 기술적 우위를 자랑하던 두 나라가 왜 끝내 달에 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제시된다.
첫째, 군사적 가치의 문제다. 1969년 펠프스 해군참모총장의 "달은 해협을 내려다보지 않는다"는 증언은 달 착륙이 루이나의 안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한다는 군부의 인식을 요약한 것으로, 사비에트의 달 관측 기지 구상이 기각된 이유도 같았다.
둘째, 위신의 문제다. 달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경쟁 무대였고, 세 번째나 네 번째로 달에 가는 것은 막대한 비용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위신이 크지 않았다. 앞서 본 것처럼 랜드해협의 경쟁은 애초에 선전을 동기로 삼지 않았다.
셋째, 예산 구조의 문제다. 루이나의 우주예산에서 민간 기관인 RASA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고, 달 착륙과 같은 대형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예산은 대부분 국방부와 국가정찰국에 있었다. 1966년 루이나 정부가 달 착륙 대신 CROW'S NEST를 택할 때 작성된 검토 문서에는 "달 착륙 1회의 비용으로 궤도 관측소를 3년간 운용할 수 있다"는 문장이 남아 있다.
다만 이것이 전적으로 합리적 선택의 결과였는지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1964~1966년 루이나 내부에서 달 착륙 계획이 상당히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해군과 공군이 모두 달 착륙을 상대 군의 사업으로 여겨 지지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즉 루이나가 달에 가지 않은 것은 달의 가치를 따진 결과라기보다 누구의 사업인지를 정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첫째, 군사적 가치의 문제다. 1969년 펠프스 해군참모총장의 "달은 해협을 내려다보지 않는다"는 증언은 달 착륙이 루이나의 안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한다는 군부의 인식을 요약한 것으로, 사비에트의 달 관측 기지 구상이 기각된 이유도 같았다.
둘째, 위신의 문제다. 달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경쟁 무대였고, 세 번째나 네 번째로 달에 가는 것은 막대한 비용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위신이 크지 않았다. 앞서 본 것처럼 랜드해협의 경쟁은 애초에 선전을 동기로 삼지 않았다.
셋째, 예산 구조의 문제다. 루이나의 우주예산에서 민간 기관인 RASA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고, 달 착륙과 같은 대형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예산은 대부분 국방부와 국가정찰국에 있었다. 1966년 루이나 정부가 달 착륙 대신 CROW'S NEST를 택할 때 작성된 검토 문서에는 "달 착륙 1회의 비용으로 궤도 관측소를 3년간 운용할 수 있다"는 문장이 남아 있다.
다만 이것이 전적으로 합리적 선택의 결과였는지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1964~1966년 루이나 내부에서 달 착륙 계획이 상당히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해군과 공군이 모두 달 착륙을 상대 군의 사업으로 여겨 지지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즉 루이나가 달에 가지 않은 것은 달의 가치를 따진 결과라기보다 누구의 사업인지를 정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9. 주요 기록 [편집]
연도 | 기록 | 국가 |
1957 | 해협 최초의 인공위성 | 사비에트 |
1958 | 루이나 최초의 인공위성 | 루이나 |
1960 | 전자정찰위성 운용세계 최초 | 루이나 |
1961 | 필름 회수 정찰 성공 | 루이나 |
1962 | 해협 최초의 유인 궤도비행 | 사비에트 |
1964 | 항법위성 실용화 | 루이나 |
1968 | 위성 요격 성공세계 최초 | 사비에트 |
1968 | 부분궤도 폭격체계 배치세계 최초 | 사비에트 |
1969 | 유인 군사 우주정거장세계 최초 | 루이나 |
1970 | 적외선 조기경보위성 | 루이나 |
1974 | 궤도 사격 시험세계 최초 | 사비에트 |
1977 | 함정 발사 위성 요격 성공 | 루이나 |
1987 | 조기경보위성 불가침 협정세계 최초 | 양국 |
2019 | 루이나 우주군 창설 | 루이나 |
기록의 상당수는 당대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표의 연도는 이후 기밀 해제로 확인된 시점이 아니라 실제로 달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10. 평가 [편집]
랜드해협 우주경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긍정적인 평가는 궤도의 군사화가 역설적으로 해협의 안정에 기여했다고 본다. 정찰위성은 1962년 미사일 격차의 허상을 드러낸 것처럼 상대의 실제 전력을 확인시켜 과장된 공포에 따른 군비 증강을 억제했고, 조기경보위성은 7분이라는 조건에서도 양국이 경보 없이 먼저 쏘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 관점에서 센츄리움 궤도협정의 보호 위성 조항은 서로의 눈을 지켜 주는 것이 곧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을 제도로 만든 것이며, 이후 다른 지역의 군비 통제 논의에서도 참고 사례로 거론된다.
비판적인 평가는 그 안정이 우연에 가까웠다고 본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는 추진기를 가동하는 결정이 하루만 늦었어도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지 알 수 없는 사건이었고, 양국은 30년간 자국의 위성을 파괴하는 시험을 반복하며 궤도에 수천 개의 파편을 남겼다. 또한 센츄리움 궤도협정이 핵무기와 보호 위성만을 다루고 재래식 궤도 군비는 사실상 방치했다는 점에서, 협정이 제1차 경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제2차 경쟁의 규칙을 정해 주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역사학자 마들렌 R. 고티에는 1998년 저서 《보이지 않는 고지》에서 이 경쟁을 두고 "양국은 30년 동안 상대를 쏘지 않기 위해 상대를 쏠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고 썼다. 이 문장은 긍정론과 비판론 모두에서 인용되는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이 억지의 성공으로도, 위험의 누적으로도 읽힌다는 점을 보여 준다.
긍정적인 평가는 궤도의 군사화가 역설적으로 해협의 안정에 기여했다고 본다. 정찰위성은 1962년 미사일 격차의 허상을 드러낸 것처럼 상대의 실제 전력을 확인시켜 과장된 공포에 따른 군비 증강을 억제했고, 조기경보위성은 7분이라는 조건에서도 양국이 경보 없이 먼저 쏘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 관점에서 센츄리움 궤도협정의 보호 위성 조항은 서로의 눈을 지켜 주는 것이 곧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을 제도로 만든 것이며, 이후 다른 지역의 군비 통제 논의에서도 참고 사례로 거론된다.
비판적인 평가는 그 안정이 우연에 가까웠다고 본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는 추진기를 가동하는 결정이 하루만 늦었어도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지 알 수 없는 사건이었고, 양국은 30년간 자국의 위성을 파괴하는 시험을 반복하며 궤도에 수천 개의 파편을 남겼다. 또한 센츄리움 궤도협정이 핵무기와 보호 위성만을 다루고 재래식 궤도 군비는 사실상 방치했다는 점에서, 협정이 제1차 경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제2차 경쟁의 규칙을 정해 주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역사학자 마들렌 R. 고티에는 1998년 저서 《보이지 않는 고지》에서 이 경쟁을 두고 "양국은 30년 동안 상대를 쏘지 않기 위해 상대를 쏠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고 썼다. 이 문장은 긍정론과 비판론 모두에서 인용되는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이 억지의 성공으로도, 위험의 누적으로도 읽힌다는 점을 보여 준다.
11. 영향 [편집]
기술적으로는 해군의 항법위성이 민간 항법의 기반이 되었고, 정찰위성의 영상 기술은 상업 위성 영상 산업과 지구 관측으로 이어졌다. 기상위성, 궤도 추적망, 위성 통신 역시 상당 부분 군사 우주 사업에서 파생되었다. 오늘날 루이나의 반도체·정밀 전자 산업이 가진 경쟁력의 일부도 이 시기 위성 센서 개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제도적으로는 1958년 항공우주법이 만든 민간과 군사의 분리, 해군과 공군의 경쟁 구도가 60년 넘게 루이나 우주 행정의 틀로 남았고, 2019년 우주군 창설은 그 틀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국가정찰국의 30년간 비공개 운영은 1980년대 이후 정보기관 감독 제도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되었다.
환경적으로는 양국의 요격 시험이 남긴 파편이 지금도 저궤도를 돌고 있다. 1985년 AQ-7 시험과 2011년 사비에트 시험의 파편 일부는 현재도 추적 목록에 남아 있으며, 두 나라가 30년간 상대를 겨냥해 쌓은 능력이 이제는 양국 모두의 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궤도 파편은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가장 오래 남을 유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제도적으로는 1958년 항공우주법이 만든 민간과 군사의 분리, 해군과 공군의 경쟁 구도가 60년 넘게 루이나 우주 행정의 틀로 남았고, 2019년 우주군 창설은 그 틀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국가정찰국의 30년간 비공개 운영은 1980년대 이후 정보기관 감독 제도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되었다.
환경적으로는 양국의 요격 시험이 남긴 파편이 지금도 저궤도를 돌고 있다. 1985년 AQ-7 시험과 2011년 사비에트 시험의 파편 일부는 현재도 추적 목록에 남아 있으며, 두 나라가 30년간 상대를 겨냥해 쌓은 능력이 이제는 양국 모두의 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궤도 파편은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가장 오래 남을 유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12. 대중매체에서 [편집]
- 《궤도의 파수꾼》(1972): 사비에트 국영 영화사가 제작한 선전 영화. 궤도방위군 장교들이 루이나의 '궤도 침략'을 막는다는 내용으로, 크레포스트 정거장을 모델로 한 우주정거장이 등장한다. 실제 크레포스트가 기밀이던 시기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영화 속 정거장의 외형이 실물과 상당히 비슷했다는 사실이 1991년 이후 화제가 되었다.
- 《망루》(1996): 루이나 영화. CROW'S NEST 교대 4차 승무원의 마지막 임무와 귀환 사고를 다룬다. 1994년 계획의 일부가 기밀 해제된 뒤 제작되었으며, 사망한 승무원 3명의 유족이 자문으로 참여했다.
- 《12일》(2015): 루이나 방송공사(RBC) 6부작 드라마. 1984년 정지궤도 위기를 국방부 상황실과 전략잠수함, 사비에트 궤도방위군 관제소의 시점에서 교차해 그린다.
- 《7분》(2009): 루이나 작가의 장편소설. 조기경보위성이 사라진 가상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경보 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해군 장교의 이야기를 다룬다.
13. 여담 [편집]
- 루이나 해군이 KESTREL 캡슐 회수에 투입한 구축함들의 별칭 '포수'는, 1972년 KESTREL 계획이 끝난 뒤에도 해군 내에서 위성·미사일 시험 지원 함정을 부르는 은어로 남았다.
-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은 1962년 고고도 핵실험 이후의 긴장 속에서 1965년 개설되었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의 17차례 교신은 개설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교신 횟수로 기록되어 있다.
- '7분'이라는 표현은 이후 루이나 정치권에서 결정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이게 되었다.
- 헤론 1호는 1971년 대기권에 재돌입해 소멸했다. 퀴냉 곶 해군 미사일 시험장에는 1958년 2월 폭발한 첫 턴 발사체의 잔해 일부가 지금도 전시되어 있다.
- 1987년 협정 서명식이 열린 센츄리움의 회의장에는 양국이 선물한 위성 모형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데, 루이나는 WATCHFIRE를, 사비에트는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를 보냈다. 서로가 상대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느꼈던 위성을 골랐다는 해석이 있다.
14. 관련 문서 [편집]
[1] 이 표현은 역사학자 마들렌 R. 고티에의 1998년 저서 《보이지 않는 고지》에서 처음 쓰였다.[2] 신비와 궤도 활동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비와 궤도 문단 참고.[3] 1990년대 공개된 사비에트 측 회고에 따르면 제1설계국 수석설계자 발렌틴 P. 오를로프는 첫 위성을 순수 과학 위성으로 발사하기를 원했으나, 국방인민위원회가 군사 탑재체를 발사 승인의 조건으로 내걸어 수신 장치를 싣게 되었다고 한다.[4] 이 때문에 루이나 우주군은 창설 당시부터 "해군이 허락한 만큼만 독립한 군"이라는 평을 들었다.[5] 랜드해협/설정/신비 참고.